혼(魂) - 몽환의 협곡 - 43
장르: 현대판타지
글쓴이: 고스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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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밖으로 비가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고 휠체어에 앉은채 창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조용히 보고 있는 츠이시 요이가 있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시 감상에 젖어있던 창백한 그녀는 슬픈듯이 미소 짓더니 휠체어를 돌려 방문을 향했고 문을 열고 힘껏 문지방을 넘은 후에 켄지의 방앞으로 가서 말했다.
"켄지."
"응?"
"나와봐."
"무슨 일이야?"
나마루 켄지가 자신의 방문을 열고 나오자 요이가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산책 나가자."
"에? 밖에 지금 비가 엄청나게 오고 있는데?"
"그러니까, 나가고 싶어."
"괜찮겠어? 추울텐데."
"응, 너랑 같이 빗소리들으면서 걷고 싶어."
켄지가 생각하기에 요이가 아파서 거의 방안에서만 지낸지 제법 되긴 했기에 많이 답답할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아프기 전만 해도 산이며 들이며 돌아다니던 그녀였기에 더욱 그런면이 부각되기도 했기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갔다오자."
아직 해가 지진 않았기에 주변이 안어두워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켄지가 깔끔한 색조의 흑백 트레이닝 복을 입고 나왔을때 복도에선 요이가 여전히 잠옷을 입은채 앉아있었다.
"어…요이? 그러고보니 너 옷은 어쩌지?"
"이대로 나가자."
"뭐? 너 지금 잠옷입고 있어."
"무슨 상관이야?"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그래도 다리가 안움직여서 갈아입기도 힘든걸. 뭐, 켄지군이 내 바지를 벗겨준다면 기꺼이 갈아입겠지만."
"다시 생각해보니까, 휠체어와 잠옷 조합은 나쁘지 않은거 같아."
"헤~ 뭐야~"
"흠흠!"
괜히 헛기침을 해보는 켄지를 보며 웃는 요이를 데리고 켄지는 2층 현관으로 가서 먼저 요이를 안아들고 1층 문앞까지 데려다 주었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가 휠체어를 가지고 내려왔다. 그리고 휠체어에 앉은 그녀의 위에 하늘색 우산을 펼치며 말했다.
"자, 그럼 출발한다."
"응."
아직 학생들이 하교할 시간도 아니었기에 주택가의 거리를 한산했다. 가끔씩 걸어가는 행인 몇명을 제외하고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기에 편한 마음으로 휠체어를 밀며 켄지가 말했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 있어?"
"글쎄…나 이 주변 전혀 모르니까 오늘의 코스는 켄지군에게 맡길게."
"음~ 어디가 좋을까나."
"켄지네 학교 가볼까?"
"읏."
아무리 하교시간이 아니라지만 결석까지한 녀석이 학교 주변에서 괜시리 어슬렁거려봐야 좋을게 하나도 없었기에 그는 빠르게 거절했다.
"아니아니, 그건 좀 아닌거 같아."
"왜~"
"생각보다 거리도 좀 있어서 잠옷 한장 걸친 사람이 갈만한 거리는 아니야."
"쳇. 일이 잘풀리면 나도 거기 다닐텐데."
"정말?"
조금 놀란 켄지에게 요이가 고개를 돌려 슬며시 웃어보며 대답했다.
"응, 내가 신청할거야. 정말 정식으로 전학생이 되서 켄지랑 같이 공부할거야. 그리고 네 옆에 앉아서 하루종일 이것저것 질문할거다?"
"글쎄, 나도 공부를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나보단 잘할거 아냐? 난 학교에서 뭘 가르치는지도 모르는걸."
"음…기본적인 산수는 할줄알아?"
"에~ 너무 심했다 그건. 날 너무 바보로 보는거 아냐?"
"그럼 벡터라던가 행렬, 미적분 같은건 할줄알…려나?"
"……."
요이가 그게뭐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켄지가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미안, 이런 것들은 나도 잘몰라."
"그럼 같이 공부하면 되겠다. 서로 모르는거 가르쳐주면서."
"좋네. 마침 나 동아리 활동한다고 학교에 늦게까지 있으니까 중간중간마다 도서실에 가서 너 도와주면 될거 같아."
"에~ 같이 안있구? 어떤 동아리 하는거야?"
"그냥 학교와 관련된 이런저런 서류 정리하고 그런거야. 말이 동아리 활동이지 거의 봉사활동 수준이지."
"재밌어?"
"음~ 뭐랄까. 하면 이런저런 이점이 있길래 지금 동아리 담당 선생님의 추천으로 시작하게 됐었지. 재미랄건……."
켄지는 동아리 활동을 하며 내심 짝사랑 대상이었던 이리 세이키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게 정말로 좋았었다. 처음엔 그저 선생님의 추천으로 별 생각없이 했었지만 나중엔 세이키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정말로 좋았기에 계속해서 남아있는것만 같았다. 츠이시 요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남몰래 가장 좋아하던 여학생이었기에 말이다. 하지만 어느순간 츠이시 요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삶 깊숙히 들어왔고 그뒤로 세이키에 대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록 요이와 함께했던 많은 기억을 잃어버렸긴 하지만 그뒤로도 계속된 츠이시 요이의 헌신과 희생을 보며 조금씩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지금 츠이시 요이가 아픈 이유만 해도 켄지 자신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그녀가 자발적으로 한 행동이다. 그 누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서 자신의 건강과 목숨을 담보로한 모험을 한다는 건가?
자신의 손목시계 뒤에 쓰여진 요이와의 흔적, 그리고 여러가지 정황상 켄지도 자기가 요이와 사뭇 진지한 관계까지 간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게 어떤 사이인지는 요이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그녀가 알려줄것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어렵다."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온 켄지에게 요이가 물었다.
"어떤게 어려워?"
"아…그냥……."
켄지 자신도 요이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세이키를 좋아하던 마음은 어떻게 해야할지 너무나 애매했다. 마음 속의 저울은 요이를 향해 기울면서도 다시 세이키와 평형을 맞추기도 했다. 그리고 세이키 쪽에 얹혀지는 무게추들은 '일상', '안전한 삶', '원래 좋아하던 짝사랑'과 같은 것들이었다. 목숨을 걸 필요도 없고 평온하고 안정적인 사회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매력이었다.
"원래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새로 친해진 친구랑 원래의 친구 중에 어떤 친구랑 더 친하게 지내야할까?"
"음? 켄지군도 참~ 둘다 친하게 지내면 되는거잖아."
"하하…그러면 좋겠지만 딱 한명하고만 베스트 프랜드가 되어야 한다면?"
"에~ 그런거 어려운걸."
"그렇지?"
하지만 켄지도 이유를 알기 힘들었다. 무엇일까 목숨을 걸어야한다는 엄청난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수없는 거대한 무게추가 요이의 위에 얹혀져있음을.
요이는 가만히 눈을 감은채 고민하면서 중얼거렸다.
"기존 친구에 대한 의리와…새로 사귄 친구의 매력 같은건가."
"뭐 그런거 비슷하다고 봐야겠지. 다만, 기존의 친구도 충분히 매력적이야."
"에~ 나는 항상 친구 한명씩만 사귀어서 이런 고민할 필요가 없었는데. 근데 친구면 그냥 다 친해져버리면 안돼?"
"그러면 좋겠지만…굳이 골라야한다면?"
"음~"
어느덧 잡초가 무성하고 한적한 공터에 도착했고 켄지가 멈추었을때 요이가 눈빛을 반짝이더니 해답을 찾았다는 듯이 말했다.
"의외로 간단한 답이야. 날 목숨걸고 지켜줄 정도로 좋아해주는 친구. 그 친구랑 가장 친하게 지내면 되는거야."
"목숨걸고라……."
"응. 간단하지? 이 세상에서 목숨만큼 귀한건 없어. 근데 그걸 포기할 정도로…좋아해주는 그런 친구."
그리고 요이는 한때 자신을 위해 희생한적이 있는 켄지를 바라보았고 켄지는 조금 당황하며 말했다.
"뭐, 뭐야 갑자기 그런 눈빛."
"…이리와."
"에? 뭐, 뭘? 어떻게?"
"고개 숙여줘."
켄지가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자 그런 그의 목을 어루만지며 요이가 부드럽게 말했다.
"어때? 내가 말한게 답이지?"
"으, 응…그런거 같네. 그런걸 확인했을땐 이미 그 친구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확률이 높겠지만……."
"흐응~"
그러면서 요이가 켄지의 목뒷덜미를 만졌을때 그녀는 그제야 켄지의 등뒤가 완전히 젖어있음을 알았다.
"켄지?!"
"응? 왜 그래?"
"너…등 다 젖었잖아."
"어…그거야 뭐 별거 아니잖아. 하하…."
휠체어에 타고 있는 요이가 안젖게 하기위해 우산을 자신의 몸보다 앞으로 들고있었기에 등이 다 젖어버렸지만 켄지는 요이만 비에 안맞으면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별거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요이는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미안함에 조용히 말했다.
"나, 나도 비 맞을래…."
"뭐? 한 사람만 젖으면 됐어. 그러지마."
"아냐, 나도 비 맞고 싶어! 비 맞는거 좋아해."
"하지만 지금 너 몸도 안좋은데……."
그렇게 말하는 켄지의 옷깃을 요이가 잡아내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치만 나…젖고 싶은걸……."
"……."
그리고 이러지는 요이의 간절한 눈빛에 켄지가 별수없다는 듯이 우산을 접으며 말했다.
"그래, 오늘 산책의 주인공은 너니까. 대신, 나도 같이 비 맞겠어."
"에?"
"왜그래? 휠체어에 잠옷 입은채로 앉아있는 여자애만 비에 홀딱 젖게 만들고 뒤에서 우산들고 서있는 남자는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래, 우리 같이 하자."
하염없이 내리는 비 아래에서 요이도 켄지도 비에 젖기 시작했고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느끼며 요이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켄지군."
"응?"
"만약 내가 회복하지 못하고 한달이나 두달이나 1년이나 10년이나 이렇게 약해져있음 어쩌지?"
"……."
그말을 들은 켄지는 잠시 자신의 젖은 머리를 손으로 다듬더니 요이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한달이면 번거롭겠지만 간호하는데 익숙해질거고 두달째엔 더 능숙해져있겠지. 1년 뒤에는 입시 때문에 내가 좀 바쁘겠지만 숙련되었을테니 문제없을거고…10년쯤 되면 네 눈빛만 봐도 뭐가 필요한지 알겠지. "
"……나 버리진 않을거야? 10년씩이나 이러면 난 네 인생에 방해만 될거 같은데……."
그녀의 조심스러운 말에 켄지는 무슨 소리냐는듯이 피식 웃더니 그녀의 옆에 좀더 다가서서 공터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정말 10년쯤 되면 함께 여행이나 가자."
"……."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가슴으로 모은 요이는 얼굴에 홍조를 띈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그런줄 모르는 켄지는 요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요이? 괜찮아?"
"괜…찮아. 정말루……."
켄지의 물음에 울먹이며 겨우 대답하는 요이를 보며 켄지가 앉아서 요이와 눈높이를 맞추곤 걱정스레 말했다.
"너 우는거야?! 정말 괜찮아?"
"울긴……."
눈물이 빗물에 섞여서 흐르는 가운데 요이가 고개를 들고 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행복한데 왜 울겠어?"
"…다행이네."
"추워, 안아줘."
"뭐?! 그러니까 왜 비 맞자고 그래?"
"빨리 안아줘!"
"근데 우리 둘다 완전히 젖었잖아. 차라리 집에 빨리 들어가는게……."
그때 요이가 팔로 켄지를 잡아 당겨서 와락하고 껴안았고 켄지는 어떨결에 그런 그녀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너, 아프다는거 거짓말이지? 나 당기는 팔힘이 장난아닌데?"
"시끄러워."
"근데…생각보다 따뜻하네. 우리 둘다 이렇게나 젖었는데."
"……."
그렇게 두 남녀가 아무말도 없이 서로를 안고 있는 가운데 많이 멀지 않은 곳, 공터의 옆에서 똑같이 비에 완전히 젖었지만 따스함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태의 미정이 오들오들 떨면서 중얼거렸다.
"실화냐……."
[다음화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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