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魂) - 몽환의 협곡 - 37
장르: 현대판타지
글쓴이: 고스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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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됩니다."
"……."
고개를 흔들며 거절하는 몽환술사를 매섭게 노려보며 츠이시 요이가 물었다.
"어째서?"
"지금 당신이 들어가봐야 상황은 뻔합니다. 분노하고 흥분한 상태에서 다 때려죽이고 포효하겠죠. 흔하게 나오는 열받은 주인공 졸라쎄 같은 그런거 말이에요."
"내가 어딘가의 주인공이라 생각한 적은 없는데? 그리고 그런게 흔해?"
"아…흔한건 일단 넘어가고, 당신의 삶에서 주인공은 당신이에요. 그 누구도 아닌 당신을 중심으로 전개되니까요. 연인이든 자식이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무게가 약간 움직이긴 하겠지만 당신이 주체라는 점에선 변화가 없습니다. 하물며 자각몽은 어떻겠나요? 그곳에선 당신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곳입니다."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면 정말 끔찍하고도 비극적인 이야기겠네."
"그렇게 생각하는 것…그렇게 각인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꿈 속에서도 그렇게 나타난것이라 생각합니다. 스스로가 죽을지도 몰라, 끔찍하게 살해당할거야 같은 생각을 하다보면 자각몽에선 실제로 일어나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지금같이 흥분한 상태에선 뻔하겠죠."
"……."
몽환술사는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요이를 설득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자기 자신도 그녀를 통제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흥분해서 요괴들을 다 죽여버리고 코우사카 안즈를 구하든 어쩌든, 몽환술사는 요이가 안즈에 대한 트라우마와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자신이 할일에 대한 방해꾼이 제거되기를 바랄뿐이긴 하지만 자신의 능력이 엄청나게 제한되는 츠이시 요이의 꿈속에서 그녀가 폭주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대처해야할지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이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는지 요이는 기세가 약간 누그러지며 말투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존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흥분하진 않을거에요. 예전에 분노와 흥분에 휩쌓여서 싸움에 임했다가 오히려 바보같이 저도 죽을뻔 한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거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을 뻔한적이 있었으니까요. 어쩌면…남자는 결국 구했지만 약혼자는 영원히 잃어버린게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매몰의 숲에서 있었던 일을 알리가 없는 몽환술사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고 그것을 본 요이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쓸데없는 얘기까지 해버렸네요. 꿈속이라 그런가…아무 말이나 해버리는거 같은데 신경쓰지마세요."
"아니, 그…흥미롭네요. 나마루 켄지씨 전에 다른 약혼자가 있었나요? 무슨 일이……."
"부탁이에요,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
호기심이 발동한 몽환술사였으나 섣불리 건드렸다간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감이 안잡혔기에 그냥 넘어가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음, 그러면 일단 진정하자는 의미에서 당신이 왜 죽었는지 제가 지켜보며 느낀 점을 말하겠습니다."
"좋아요."
"우선, 츠이시 요이씨가 죽는 이유로는 안즈라는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가 가장 큰것 같네요. 움직임의 방향이나 행동들이 죄책감 때문인지 모두 안즈라는 인물을 지키기 위해 자신은 아끼지 않는 방향으로 가 있어요."
"그럼 그 친구를 구하기 위해 꾸는 자각몽인데 친구를 버릴까요?"
"버리라는게 아니에요. 츠이시씨는 그…요괴들을 끌어들이는 저주를 가지고 있으니까. 안즈를 향해 도망치기보단 다른 곳으로 유도해서 처리하는게 어떨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거 안통해요."
"해보지도 않고 확신하시는군요."
츠이시 요이는 묘한 표정을 지은채 몽환술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몇년전에 현실에서 비슷하게 해봤는데 안되더라구요, 그거."
"……그런거군요."
"보여줄까요?"
요이의 묘했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씁쓸하게 변해있었고 슬픈듯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안즈가 어떻게 죽었고 제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요."
"불편하시다면 안해도 되지만, 가능하면 알고싶긴 하군요."
"고백하는 심정으로…보여드리죠. 이런다고 저의 죄책감이 덜어지진 않겠지만…자각몽이 아닌 일반 꿈으로. 가끔…잊을만하면 꾸던 악몽이니까 더 자연스러울거에요."
"좋습니다."
잠시 후 몽환술사의 앞에서 펼쳐진 악몽은 일반적인 꿈과는 배경부터가 달랐다. 검붉게 물든 하늘은 깨진 얼음과 유리조각 파편처럼 금이가고 흩뿌려져 있었으며 구름한점 보이지 않았으나 검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말라붙은채 뒤틀린 나무들이 귓가에 속삭이듯 알아듣지 못할 기분 나쁜 말들이 들려오는 어두운 숲속에서 코우사카 안즈와 츠이시 요이는 달리고 있었는데 수십 미터 뒤로는 별의 별 흉측하게 생긴 요괴들이 바닥을 기고 나무를 타고 땅을 울리며 그들을 뒤쫓고 있었다.
몽환술사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들을 바라보며 조용히 있을때 안즈가 지친듯이 가슴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하아하아……야…나 더는 못뛰어…."
"계속 움직여야해! 따라잡히면 무조건 죽는다고!!"
"이미 거의…탈진한거 같은데……."
"거의 다 왔어. 조금 있으면 그 낡은 벙커라구!!"
"알아 나도 그러곤 있는데…하아…X발…무슨 마라톤도 아니고…하아…전력질주를 하아…하는건……한계가 분명하잖아……."
안즈가 현저하게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하자 요이는 뒤를 돌아보며 상황을 확인해보았지만, 이미 요괴들의 규모는 혼자서 어찌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시간을 끌기는 커녕 둘러쌓여서 곱게 죽으면 그나마 다행일것만 같은 수백마리의 무리에 요이는 자신의 전술가방을 재빨리 집어 던지며 안즈에게 자신의 보우건을 들려주었고 그것을 본 안즈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요이는 안즈의 한팔을 당기며 들쳐업고 뛰기 시작했다.
"야?!"
"안즈, 그 상태로 가까이 오는 놈만 한발씩 맞춰줘."
"하아…나 이런거 못쏜다고! 거기다 업혀있는데?"
"살고 싶으면 해내야해."
"미친! X발! X같네!!"
요이도 땀을 흘리며 검은 얼음과 유리 같은 파편들을 헤쳐나가는 그때 안즈는 겨우 한팔을 뻗으며 뒤로 보우건을 쏘려고 했지만 한손무기가 아닌 보우건을 한팔로 뻗어 조준하는것만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들의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진 것은 물론, 뒤의 요괴들은 십여 미터 정도까지 뒤쫓아온 상태였다. 공포가 서린 표정으로 안즈가 말했다.
"저기…요이, 가까이 오는 놈이 아니라 떼거지로 가까이 몰려오는데 이거 5발로 어떻게 될게 아니잖아?"
"하아…하아……."
가쁘게 숨쉬며 달리기만 해도 바쁜 요이가 대답을 못하자 안즈는 별수없다는 듯이 보우건으로 제대로 조준을 해보려고 했는데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요이의 중심을 흐트리고 말았고 결국 넘어지며 땅바닥을 구르고 말았다. 안즈를 업고 있었기에 충격을 제대로 분산시키지 못하고 거의 그대로 엎어진 요이와 그 옆에 나동그라진 안즈가 다급히 일어서려고 할때도 요괴들은 몰려오고 있었다.
엎어진채 몰려오는 요괴들을 바라본 요이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고 안즈는 거의 패닉상태까지 가려는 듯했다.
"야 이거 X발…우리 어쩌냐."
안즈가 덜덜 떨면서 말을 하는 몇초 사이, 요이의 머리는 매우 간단한 메세지를 그녀에게 전달했다.
살아남아라.
"넌 계속 앞으로 달려."
요이는 나지막하게 말하곤 겨우 수미터 앞까지 몰려온 요괴들을 보며 박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안즈 옆에 떨어진 보우건도 내버려둔채 전속력으로 안즈와 함께 가던 방향의 직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움찔거리다가 요이를 쫓아가야하나 하고 잠시 망설이던 안즈는 자기 속도로는 절대로 요이를 못따라가고 잡혀 죽을게 뻔하다고 생각하곤 이를 악물고 계속 달리던 방향으로 온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어두운 기억의 파편 속을 정신없이 헤치며 달려나가는 요이를 향해 얼마나 많은 요괴들이 방향을 틀었는지는 알수가 없었다. 그래도 요괴들의 입장에선 흔한 인간 여자 하나보단 츠이시 가문의 퇴마사가 훨씬 먹음직 스럽고 사랑스러운 장난감이기에 충분히 많은 수가 요이의 뒤로 따라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느낌만 들었을뿐 진짜로 뒤에서 얼마나 쫓아오는지는 몰랐다.
츠이시 요이는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치고 있었으니까.
정신없이 달리고 산을 내려가고 구르고 뛰던 어느순간 요이가 멈췄을때 주변은 고요했다. 풀벌레 소리 하나없이 고요한 그때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이름 모를 도시.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등산로 근처를 둘러보며 최대한 가까운 통신장치를 찾아보았다.
멀지 않은 곳, 어둠 속에 덩그러니 밝게 불이 들어온 공중전화 박스를 본 그녀는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닫고는 정신없이 긴급번호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한참 신호가 가다가 어떤 여성이 전화를 받았고 요이가 소리쳤다.
"츠이시 요이입니다! 도와줘요! 지금 엄청 긴급한 상황이라구요!!"
『이 회선은 도시근처인거 같은데, 민가 근처로 내려가는 것은 규정위반입니다.』
"지금 그딴게 문제가 아니야!! 친구를 버려…친구가 죽을 지도 모른다구요!"
『친구라 함은 협력자를 뜻합니까? 지금 츠이시 요이씨와 함께 훈련중인 협력자는 없는 것으로 나옵니다만.』
"면역자! 친구에요…제가 데려온!!"
『그냥 면역자면, 잊어버리세요. 츠이시씨가 살아남았으면 된거 같은데요.』
"어떻게……그렇게 말할수가 있어. 아직 안늦었을수도 있어, 장비와 인원을 지원해줘!!"
『왜 그러시죠? 여기는 퀵서비스가 아닙니다. 평소에 친구랍시고 데려온 면역자 한둘 죽어도 눈 하나 깜박 안하던 분이 왜 그러세요? 박하현과의 임무 후에 성자라도 된거 같나요? 이제부터 뭐 한명도 안죽게 잘지키겠어 같은 태도에요? 당신은 아직 남을 지키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임의적으로 면역자를 데리고 사귀었습니다. 그에 대해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는건 없습니다.』
"부탁이야…거의 모든 장비를 숲속에 두고 왔어…지금 보우건도 없다구……. 나 혼자서는 친구를 구하러 못가."
『어째서죠?』
"엄청나게 많은 요괴들에게 쫓겼어. 한두마리 정도가 아니였다고. 난 분명히 정해진 구역으로만 이동했는데……갑자기 이상하게 많은 놈들이……."
『그래서 요괴들에게 쫓기고 있는데 도시로 도망을 쳤다는 겁니까. 정신이 나간게 아니라면 그 면역자나 자기목숨보단 도시의 안전을 생각하시죠. 주변에 요괴들이 왔나요?』
그제야 전화기에서 눈을 떼어 유리로된 전화박스 주변을 둘러보는 요이였지만 한치 앞도 안보이는 어둠 뿐이었다. 거대한 어둠 속에 작게 불이 켜진 공중전화 박스 안의 요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니요…그런거……없어요."
『천운이로군요. 지금 그곳에 있어도 민가에 피해를 줄터이니 당장 숲속으로 돌아가세요.』
"네? 장비도 무기도 없어요!"
『완전 비무장인가요?』
요이는 자신의 전투복에 결속되어있는 대검을 슬쩍보고는 말했다.
"대검이랑 포스트잇이 있긴한데……."
『그정도면 숲속으로 돌아가세요.』
"너무 하잖아…우리 가문이잖아!! 우린 가족인거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어!!"
『…….』
수화기 너머의 여성은 잠시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그건 당신이 계속 살아남아서 정식 퇴마사가 됐을때 얘기고. 지금의 요이, 당신은 가끔씩 잊을 만하면 죽는 친척중 하나라고 해야겠네. 살아남은거나 감사하라고. 너같이 굴다가 비참하게 죽는 애들 한둘 본거 아니니까.』
"너무해…어째서……."
『이게 현실이야.』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을때, 요이는 무릎을 꿇으며 털썩하고 주저앉았고 녹아내린 마스카라 같은 검은 눈물을 흘리며 정신나간 얼굴로 어둠 만을 바라보았다.
[다음화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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