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魂) - 몽환의 협곡 - 59
장르: 현대판타지
글쓴이: 고스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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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교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의 츠이시 요이는 나마루 켄지의 옆에 앉은채 편히 눈을 감고 잠들어있었다. 헬리콥터를 타고 갈때만 해도 무거웠던 그녀의 표정은 지금 그간의 걱정도 근심도 없었고 평안만이 있어보였다.
벙커 안에 남아있던 코우사카 안즈의 유해와 유품들을 수습했고 그중에 핸드폰은 요이의 아버지에게 별도로 보내서 조사를 맡겼다. 평소에 보조 배터리든 수동 충전기든 무슨 짓을 해서든 핸드폰만은 살려놨던 안즈라고 하니, 그녀가 죽기전에 단서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요이의 예상이었다. 몇년의 세월간 데이터가 손상됐을 우려도 있으나 다행히 벙커 안에 있었기에 뭔가가 나올 기대도 큰 상황이었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한 후, 츠이시 요이와 웃으며 포장마차에서 다코야끼를 사먹고 그 맛에 깜짝 놀라는 요이를 보며 켄지는 기분이 묘해졌다. 남들과 접촉하는 것만 조심한다면 그녀는 약간 생활적 상식이 없는 평범한 소녀와 똑같아 보였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쫓기지도 않았고 언제나 긴장한 상태에서 무기를 든채 잠들 필요도 없었다. 요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켄지와 둘이서 가고 싶다고 했던 것은 이런 여유를 만끽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도 가보며 자신이 정말로 저주가 없어진것 같이 느끼면서 걷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고, 비록 저주가 없어진 것은 아닐지언정.
며칠 뒤 요이의 건강이 날로 안정적이게 되었고 켄지도 걱정없이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까지 다 하며 다닐 무렵, 요이의 아버지로부터 등기가 왔다. 그안에는 작은 데이터 단말기가 들어있었고 컴퓨터로 연결하자 제일 첫 폴더에 영상 하나가 들어있었다. 모니터 앞에 의자 2개를 두고 나란히 앉은 켄지와 요이가 그것을 재생했다.
『요이, 내 딸. 활기를 되찾아서 다행이구나. 내가 한번은 찾아갔어야 했는데……미안하다.』
"아니에요. 언제나 바쁘신걸요. 그리고 이젠 걱정 안하셔도 괜찮아요."
분명 동영상이지만 요이는 마치 화상채팅이라도 하고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보내준 핸드폰에서 데이터를 복구하고 추출…했단다. 네 개인적인 이야기일테니 대략 영상이 재생되는 것만 확인하고 너에게 보내는 거라서 안에 무슨 내용이 있을진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구나.』
"고마워요."
『다만…확인하며 돌려보는 과정에서 약간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는데…. 궁금한게 생기면 내게 다시 연락다오. 잘지내고.』
요이의 아버지가 살며시 미소지으며 손을 흔드는 것을 끝으로 영상이 종료되었고 다음 폴더에는 여러가지 영상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모두다 코우사카 안즈가 남긴 영상들이었다. 시간 순으로 가장 첫번째로 찍었을 영상을 틀어보았다. 영상의 제목은 「저주」.
『이 XX!! X같은 X년아!!』
뜬금없이 욕부터 튀어나오는 영상에 켄지와 요이가 기겁을 했고 셀카 찍듯이 각도를 든 안즈가 상처가 가득한 모습으로 외쳤다.
『야, 보여? 보이냐고! 나 버리고 튀니까 좋냐? 좋아? 살아는 남았냐? 개같네 진짜. 난 여기 벙커까지 도착했어. 근데 넌? 넌!! 날 버리고 존나 잽싸게 도망가냐 XX년아!!』
요이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켄지도 떨떠름한 표정인 가운데 안즈가 말했다.
『여긴 뭐…다행이라면 뭔가 남아있을지 뒤져볼 만한 가치는 있는 곳인거 같긴해. 근데 불빛이라곤 이 핸드폰 불빛밖에 없고 밖에는 빌어먹을 괴물새끼들이 있으니 나갈수도 없어. 쉽게 말해 난 이제 여기서 갇힌채 죽을거야!! 그리고 츠이시 요이! 너도 언젠가 이 고통과 원한을 뼈저리게 느끼며 죽을거야. 널 저주해. 진심으로. 배터리 아껴야하니까 이만 끈다.』
첫번째 영상이 끝났다. 켄지는 말없이 두번째 영상을 틀었다. 영상의 제목은 「난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
그 영상속에는 피곤해보이고 약간은 수척해보이는 안즈가 있었다.
『안녕 요이. 아, 뭐…혹시나해서 말하는건데 이 영상을 보는 사람이 만약 괴물이나 요괴의 존재를 안믿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이 동영상을 보지말고 당장 끄고, 집에나 가라고. 괜한 호기심에 이 영상들을 끝까지봤다간 평범한 생활은 아작 나니까 말이지. 어쨌든 경고는 했고…….』
셀카 카메라의 각도를 살짝 낮춘 안즈가 말을 이었다.
『다행히, 내가 즉사하지 않았다는게 안도 되는 점이야. 엉뚱한 영상이나 메시지들 전부다 삭제하거나 잠금해서 숨겨둘 여유가 생겼어. 솔직히 찝찝하잖아? 내가 쓰던 핸드폰 남이 들춰보면 말이지. 정말 비밀스러운건 다 삭제했고 요이 네가 봐도 될만한 것들은 잠금해놨으니까 재주껏 풀어서 보든가. 난 지금 그냥…배가 고파. 그간…제대로 먹질 못했어. 옛날 세계대전때 남겨둔 썩은 군용 식량 같은게 조금 보이긴 했는데 저런거 먹으면 죽을거 같으니까……아니, 어차피 죽을건데 생명 좀 연장시켜봐야 뭐하겠어. 아마 다음에 남기는 영상이 마지막이 될거 같네. 이만 끈다.』
두번째 영상이 끝났다. 켄지는 말없이 세번째 영상을 틀었지만, 안즈의 말과는 다르게 마지막 4번 영상이 남아있었다. 세번째 영상의 제목은 「와줘서 고마워」.
이젠 정말 힘들어보이는, 다 죽어가는 얼굴의 안즈가 휴대폰을 셀카 각도도 아니고 바닥에 대충 어딘가 기대어 놓고 찍은 듯한 상태로 자신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안녕…츠이시. 이젠 힘들어…말하는 것도. 그래도 뭐랄까……계속 죽음을 기다리다보니까…. 뭔가 생각이 나더라고…. 결국 네가 이 영상을…다른 사람이 아닌 요이 너가 이걸 보고 있다는건 네가 다시 내게 돌아왔다는걸 의미하잖아?』
그말을 끝낸 안즈는 뭔가 모든걸 내려놓은 사람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거면…된게 아닐까 싶네. 고마워. 내게 돌아와줘서. 영영 도망가 버린게 아니라…양심의 가책이 됐든……뭐가 됐든 다시 날 찾아와줘서 말이야. 처음에 원망 담긴 영상은 지워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그 순간의 내 감정이 잘남아있어서 그냥 남겨뒀어. 어쨌든 네가 날 버리고 도망간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내게 돌아와준것도 사실이니까. 난 널 용서해.』
요이의 눈이 묘하게 떨리는 가운데 안즈도 화면을 바라보며 힘없이 말을 이었다.
『만약 그때 네가 나와 같이 있었어도 같이 갇혀서 죽었음 죽었지 뭐, 내가 살 수 있을거 같진 않으니까. 네가 살아있으면 나도 살 가능성이 있고 네가 죽으면 난 무조건 죽는거니…내가 선택한 여행이었고 이제와선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만 남은거 같아. 혹시 너가 살아서 날 구하러올까 싶어 기다려보기도 했지만, 더 이상은 무린거 같아. 무리겠지…그렇게 많은 요괴무리를 어떻게 뚫겠어. 하 씨X…죽는 놈이 말 제일 많다더니 이제와서 이리저리 주절거리는거 봐라…. 어쨌든 결론은! 나한테 죄책감 가지지마. 이 영상을 본, 날 데리러 다시 와준 넌 더 이상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없어. 혹시 살아남아서 이 영상을 보고 있다면…행복하게 잘살아라 이년아. 난 죽기전에 신선한 공기나 좀 마셔야겠다. 잘있어, 요이.』
안즈가 씁쓸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영상을 껐고 켄지는 말없이 입을 가린채 눈물을 흘리는 요이를 슬쩍 봤다가 네번째 영상을 켰다. 영상의 제목은 별도로 없었고 자동저장된 것처럼, 날짜와 월 일로만 이루어져있었다. 영상이 켜지자 마자 해치 밖의 어두운 밤이 핸드폰 불빛으로 아주 약간 밝혀지고 있었고 안즈가 밝다못해 반쯤 미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하하! 미친…X발……. 어이, 요이! 놀라운거 알려줄까.』
안즈가 핸드폰 화면을 주변으로 돌리며 말했다.
『미친 소리 같겠지만…지금 화면에는 아무것도 없지? 근데 지금 내 두눈엔 주변에 요괴들이 바글바글하고 나한테 달려드는게 보여. 근데 웃긴게 뭔줄 알아? 놈들이 그냥 날 통과해서 지나칠 뿐이라는거야. 하하…이게 다……우리가 헛 걸 본거라는거야. 허깨비한테 쫓긴거라고!』
안즈가 핸드폰을 들려 자신의 얼굴을 찍으며 말했다.
『우린…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요괴들한테 미친듯이 쫓기고 있었어…알아? 애초에 우린 환각이든 환영이든 뭐에 시달리고 있었던 거야. 어…근데 저기 이상한 사람 같은게 있네. 하하…저것도 허깨비겠지.』
하지만 안즈가 핸드폰 화면으로 비추자 그곳엔 빨간 구두, 검은색 정장, 얼굴엔 한국식 붉은색 도깨비 탈을 쓴 존재가 그대로 화면에 나타났다.
『…….』
다른 요괴들과 달리 화면에도 잡힌 '진짜' 뭔가가 나타났다는 것에 적지 않게 당황한듯 핸드폰의 화면이 떨렸고 곧 핸드폰을 손에 쥔채 미친듯이 달리기라도 하는듯 화면이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뭔가에 머리채가 씹히고 뜯겨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몸의 균형이 일그러지더니 안즈의 뜯겨져 나간 머리와 몸이 해치 안쪽의 사다리 밑에 널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핸드폰도 땅에 떨어지며 멍하니 해치 입구를 비출 뿐이었다.
잠시후 그 해치로 붉은 도깨비 탈을 쓴 뭔가가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밖을 슬쩍 보고는 해치의 입구를 닫았다.
켄지는 시선을 돌려 옆에 앉은 요이를 보았는데, 그녀는 뭔가 엄청난 충격을 받은듯이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
"마, 말도안돼…그때 나도 안즈도……다 환영에 속아서 쫓겼다는거야?! 그래서 도망쳤을때 날 뒤쫓아온 요괴가 하나도 없었던 거냐고!!!"
요이가 자신의 머리채를 움켜잡은채 고통스러워 하고 있을 무렵, 영상 속에서 뭔가 울리듯 싸우는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잠시 후, 다시 해치가 열리자 그곳엔 상처 투성이의 츠이시 요이가 있었다. 중학생 쯤 되어보이는 앳된 얼굴에 친구의 죽음을 직접 확인함으로 인한 절망과 공포가 스며들었다.
『안즈…안즈!!』
해치로 아래를 쳐다보며 친구의 이름을 외쳐보았지만 영상 속엔 여전히 미동도 없이 머리의 윗부분이 뜯겨져 나간 안즈의 상반신과 사다리만 함께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요이는 고개를 다시 옆으로 돌리곤 아무것도 자신을 덮치지도 않았는데 뭔가 덮치기라도 했다는 듯이 단검으로 방어하며 혼자 몸을 쓰러뜨리며 화면에서 사라져버렸고 다시 화면에 나타나서 슬픈 표정으로 안즈의 시신을 쳐다보곤 해치를 닫아버렸다.
그 뒤로 들린것은 요이 혼자서 뭔가와 싸우는 듯한 소리와 달리며 멀어져 가는 전투화 소리만 있을 뿐이었고 그것마저 없어진 후에는 어둠과 고요함 속에서 배터리가 소진되어 자동으로 동영상이 저장되었다.
세번째 영상을 보고 난 후만 해도 가슴이 가벼워졌던 요이는 네번째 영상 이후 오히려 알아버린 고통스러운 진실에 몸부림 치고 있었다.
"오늘은…나 먼저 자러 가볼게."
"그래…푹 쉬어."
요이는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게 깔끔하게 정리된 2층의 여동생방 침대로 갔고 이불을 뒤집어 썼고 몇시간 동안 뒤척이며 애써서 겨우 잠들게 되었다.
…….
…….
…….
"……!"
요이가 눈을 떴을때 보인 것은 몽환의 협곡 속에 있는 오두막. 그리고 그 침대 위에 자신이 누워있었다.
"몽환의 협곡…?"
-똑 똑
요이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을때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고 요이는 재빨리 달려가 문을 열며 말했다.
"하현이?!"
"기지배…미안해서 어쩌냐 근데 나야."
문 밖엔 멀쩡한 모습의 코우사카 안즈가 손에 핸드폰을 든채로 서 있었고 요이가 적지않게 놀라며 말했다.
"안즈! 나, 나……."
"쉬~"
안즈는 두눈을 감은채 조용히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했고 말을 멈춘 요이를 향해 다시 두눈을 살짝 뜨며 말했다.
"말 안해도 알아. 이제 된거야."
"안즈……."
"이제 나와 엉켜붙어있던 너의 죄책감도 없어져버렸어. 더 이상 내가 널 미워할 이유가 없어."
"……."
"네가 그 영상들을 본 이후론, 널 용서하니까."
"안즈…!"
요이가 글썽거리며 안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고 안즈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기지배가…뭘 그리 질질짜고 그래."
"미안해서……."
"…우리 오랜만에 같이 걸어나볼까."
코우사카 안즈가 천천히 걸어나와서 몽환의 협곡에 이어진, 냇물 옆 가로수 사이로 양손을 뒤로 한채 다소곳하게 걸어가기 시작했고 츠이시 요이는 팔소매로 자신의 눈물을 훔치곤 옛친구를 향해 달려갔다.
[혼 - 몽환의 협곡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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